편집부 기자
기고자 : 백형오 목사 (광주하람교회)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다. 덜 씻고 남겨진 죄는 없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완전히 씻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시고, 딱 한 번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다 씻었다. 완벽하게 씻었다. 영원히 씻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죄도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죽을 일도 없다. 우리는 완전하게 구원받았다. 완벽하게 구원받았다. 그런데 왜 아직도 계속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이제 그 문제를 풀어 간다.
1. 사람은 영과 육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영(영혼)과 육(육신)으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사람을 영으로만 만들지도 않았고, 육으로만 만들지도 않았다. 영과 육, 한 사람으로 살도록 만드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의 영을 기준으로 삼으셨는가? 육을 기준으로 삼으셨는가? 아니면 둘 다 동등하게 기준으로 삼으셨는가? 여기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유일한 통로로 삼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을 기준으로 해서 육이 움직이도록 일하시는가? 육을 기준으로 해서 영이 움직이도록 일하시는가? 아니면 영과 육을 동시에 기준으로 삼아 일하시는가?
하나님은 영을 기준으로 해서 육이 움직이도록 일하신다. 영이 기준이다. 영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통로다. 그렇다고 육신이 무가치하거나 아무 소용이 없거나 저급하다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없으면 안 된다. 육신은 영을 강건하게 하고, 튼튼하게 하는 도구다. 무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을 세밀하고, 튼튼하고, 영리하고, 놀라운 존재로 만드셨다. 사람의 육신은 굉장한 존재다. 수많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굉장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못 할 것이 없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수 빚으셔서 만드셨다. 하나님은 명령하심으로 모든 만물을 만드셨는데, 사람의 육신은 손수 시간을 내서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2:7). 육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준이 아니고, 통로가 아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영을 기준으로 삼아 일하신다. 하나님은 왜 그러시는가?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먼저 영을 택하셨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 여기 ‘택하사’(1586, 에클레고마이)는 ‘택했다’ 또는 ‘창조했다’는 뜻이다. 창세 전에 택했다는 것은 영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영을 택하기 전에 육을 먼저 택하지 않으셨다. 영을 만들기 전에 육을 먼저 만들지 않으셨다. 영을 먼저 택하시고, 먼저 만드셨다. 먼저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영을 기준으로 삼기 위해서다. 그렇게 영을 먼저 택하시고 만드신 다음에, 육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영을 창세 전에 택하시고 만드셨는데, 육은 세상 ‘창조 때’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여기 ‘생령이 되니라’는 말은 흙으로 만든 사람이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는 뜻이다. ‘생령’(5315, 2416, 네페쉬 하야)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뜻이다. 이것은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흙이 살아 있는 생명체, 곧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육은 창세 전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창조 때 만드신 것이다. 영 다음에 택하시고 만드셨다. 그래서 영이 먼저이고 기준이다. 하나님은 영을 기준으로 삼으셨다. 육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먼저 영을 선택하셨다. 영을 먼저 창조하셨다고 해도 맞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을 기준으로 삼으신다. 영을 기준으로 삼아, 육이 영을 따라 살라고 했다. 영에게 육을 따라 살라고는 하지 않았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영이 기준이다. 영을 따라 사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영을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그 영을 통해서 소통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은 영으로 소통하신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23:2). 하나님은 육으로 소통하시지 않는다. 영으로 소통하여 그 소통의 내용이 육에 나타나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과 육을 창조하셨는데, 영을 기준으로 삼아 일하신다. 예배도 그렇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으로 드려야 한다. 영으로 드린다는 것은 육신의 것을 넘어서서 육신의 것에 제약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이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사실은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으로 드리는 그 예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은 그처럼 영을 기준으로 삼아 일하신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과 육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2. 사람의 영과 육은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영과 육을 같이 살아가도록 하나로 만드셨다.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은 변화 없이, 혼합 없이, 분별없이, 분리 없이 서로 결합 되게 하셨다. 물과 잉크가 혼합되듯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분명히 영과 육은 본질도 다르고, 성질도 다르다. 영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하늘로부터 보내셨지만, 육은 창조 때 흙으로부터 만드셨다. 사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다. 영은 육이 될 수 없고, 육은 영이 될 수 없다. 둘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로 살 수 없다.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두 존재를 하나로 살게 하셨다. 그래서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산다. 두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로 산다. 이것은 기적이다. 출처가 다르고 본질이 다른 영과 육이 하나로 산다는 게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과 육을 동시에 가진 존재로 산다.
그런데 영은 감추어져 있다. 영이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육신의 눈에는 육만 보인다. 영은 감추어져 있어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육신의 눈으로만 본다. 분명히 사람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만 있는 것처럼 본다. 그래서 모든 것을 육으로 판단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영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영과 육이 있고, 영은 감추어져 있다. 동물은 영이 없다. 육만 있다. 오직 사람에게만 영과 육이 있다. 그런데 영이 감추어져 있으니까, 사람을 마치 동물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육만 있는 동물이 아니라, 육에 영을 함께 가진 영적인 존재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하나된 존재로 살지만, 이 두 실체가 분명히 다른 존재다. 영은 절대로 육이 될 수 없고, 육은 절대로 영이 될 수 없다. 둘은 서로 다른 존재다. 우리 안에 두 실체로 존재한다. 두 실체로 존재한다는 말은 두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이 변화되고 발전한다고 육이 될 수 없고, 육이 변화되고 발전한다고 영이 될 수 없다. 영으로 계속 변화되고 발전된 것은 결국 영에 도달하는 것이고, 육으로 계속 변화되고 발전된 것은 결국 육에 도달하는 것이다. 서로 교차할 수 없다. 완전히 다른 존재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영에도 생각이 있고, 육에도 생각이 있다.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은...”(롬8:6). 여기 ‘영과 육이 서로 생각이 있다’는 말은 둘이 서로 다른 별개라는 뜻이다. 또한 ‘생각이 있다’는 말은 생각하고 사고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인격이 있다는 뜻이다. 영과 육은 완전히 다른 실체의 완전한 인격체로 있다. 영의 고향은 하늘이고, 육의 고향은 흙이다. 둘의 출처가 완전히 다르다. 둘은 각자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데, 영은 하늘로 돌아가고, 육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여기‘멸하고’(3639, 올레쓰로스)는 육신의 죽음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영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는다’는 말은 영은 고향인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결국 둘은 서로 갈라진다. 이처럼 영과 육은 완전히 다른 실체로 있다. 그러면 구원은 영과 육에게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3. 구원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렘3:23).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행실로도 아니다. 사람은 구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람에게는 구원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없다. 구원의 생산 공장은 하늘에만 있으며, 그 공장을 돌리는 열쇠도 하나님의 손에만 있다. 그래서 구원을 선물이라고 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구원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 공장에서 만들어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교만하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9). 여기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마치 자기 노력 또는 행위로 얻어진 것처럼 교만하게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을 얻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행하시는가?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람은 다 죽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엡2:1). 영과 육이 다 죽었다. ‘영과 육이 다 죽었다’는 말은 죄에 빠졌다는 뜻이다. 죄에 빠졌으니 하나님과의 소통도 끊기고, 죄로 인해서 육신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도 없고, 육신은 온갖 질병으로 시달리며 사망을 짊어지고 살게 되었다.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건강하게 살려고 해도 땅에서는 그 방법을 찾을 길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있는 것도 모른다. 구원이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고 열심히 사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여기며 산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서 사망 가운데 처했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로 인해서 받은 값은 사망이다. 영도 사망을 받았고, 육도 사망을 받았다. 죄로 인해서 받은 값이다. 그처럼 사망 상태에 있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오지 않고, 대신 사망 가운데 사는 마귀가 찾아온다. 그래서 마귀와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이런 상태로 산다. 스스로는 그런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 스스로는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도 없다. 누군가가 영과 육을 살려주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음으로 사망을 해결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죽어 무덤에 묻히셨다. 진짜로 죽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이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여기 ‘경건하지 않은 자’는 죄에 빠진 자들인 죄인을 뜻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 어떤 사람들은 죽는시늉만 한 것이라고도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분명히 죽으셨다.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에 묻히심으로 우리가 받은 죄와 사망을 다 받으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53:4).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을 짊어지고 죽으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던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17:2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믿음의 선언이다. 자신이 분명히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의 선언이다. 예수님은 믿음이시다. “믿음의 주요”(히12:2). 믿음은 예수님의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시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은 믿음의 선언이다. 그 선언대로 살아나셨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 여기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란 말은 예수님 자신이 믿음의 선언을 하신 그대로 살아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역사적 흐름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죽은 자는 어차피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 예수님도 그래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그렇게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이 살아난다고 믿음의 선언을 하신 대로 살아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사람에게 부활을 어떻게 행하시는가?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으로 죽어 있는 택한 사람들 영 속으로 들어가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부활은 생명이다. 그 부활 생명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죽어 있는 택한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가셔서 죽은 영을 살리신다. 죽어 있는 영에게 가서 죽은 영을 먼저 깨우신다. 살리신다. 살리시면서 그 죽은 영에게 예수 자신의 부활 생명을 주신다. 그래서 그 죽은 영을 살리신다. 뿐만아니라 새로운 예수님의 생명을 주신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생명은 이제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신 부활 생명이다. 땅의 생명이 아니고, 하늘 생명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생명하고 같은 생명이다. 그런 생명을 주셔서 살리신 다음에 예수를 고백하게 하신다. 죽은 사람은 그 영이 아직 살아나지도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살아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수 없다. 영과 육이 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살려주셔야 살아날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 생명을 주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 부활시키신다.
그렇게 살아나게 하신 다음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밑바닥에는 이미 예수님이 고백할 수 있도록 부활 생명을 주셨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그 공을 성도 자신에게 돌린다. 성도가 스스로 고백하여 구원받은 것처럼 말씀하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여기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예수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살리신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입으로 시인하게 하신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육신의 말로 고백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렀음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이 구원의 일을 다 하셨다. 사람이 할 일은 입으로 시인하여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뿐이다. 결국 예수님이 다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엄청 노력해서, 자기가 지혜가 있고,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구원 얻었다고 하지 못하도록 교만하게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9).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면 영만 구원을 받았는가? 아니면 육만 구원을 받았는가? 아니면 영과 육이 함께 구원을 받았는가?
4. 영과 육이 함께 구원을 얻었는가?
영과 육이 함께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영만 구원하시고 육은 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영과 육을 함께 구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과 육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다르다. ‘구원하시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은 하나님이 구원을 적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영에게는 온전한 구원을 적용하시고, 육에게는 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적용하신다. 영은 죄가 없이 온전히, 완전히 구원하시지만, 육은 영의 반응에 촉구할 수 있도록 구원을 적용하신다. 그래서 영은 완전히 구원받아 죄가 없지만, 육은 아직도 죄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구원을 다르게 적용하시는가?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왜냐하면 천국은 흙의 나라가 아니라 영의 나라이며, 영의 나라에 입성시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흙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이다. 대신 육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 영과 육을 한 몸으로 세우셨지만, 결국 갈라지게 하셨다. 영은 하늘로 가고, 흙은 땅으로 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만 천국 백성으로 구원하시기로 하셨다. 왜냐하면 천국은 흙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고 영으로 만들어진 나라이며 하늘에서 온 영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흙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영은 영원한 것이지만, 흙은 썩고 소멸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한 영과 썩고 소멸되는 흙과 한 몸을 이루게 하셨지만, 결국에는 갈라지게 하셨다. 영은 하늘로 돌아가게 하시고, 육은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결국 진짜 구원은 영에게만 해당된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육적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말은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남은 육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육적으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영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는 일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거듭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17:20). 결국 구원은 영이 구원을 받는 것이며, 그 구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구원은 죄를 남김없이 사하는 것이다. 결국 구원받은 영은 죄가 하나도 없다. 죄만 없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 구원받을 때 이미 거룩한 영이 되었다. 예수 믿을 때 이미 성화를 이루었고, 영화까지 이루었다. 더 씻을 죄가 없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여기 ‘부르시고’(2564, 에칼레센, 그가 부르셨다), ‘의롭다 하시고(1344, 에디카이오센, 그가 의롭게 하셨다)’, ‘영화롭게 하셨다’(1392, 에돜사센, 그가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의 시제가 다 부정 과거다. 부정 과거라는 말은 이미 끝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미 선택하여 불렀고, 부른 자들을 이미 의롭게 하셨고, 의롭게 하신 자들을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서정’은 성도가 예수님을 믿을 때 동시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다 이루셨다. 그래서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이 다 그렇게 되었다.
사실 성경에서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늘에서 되어진 일을 설명하는 용어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일은 이 땅의 일이 아니다. 하늘의 일이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믿을 때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 더 이상 영화롭게 될 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 성도의 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도의 영은 이미 성화도 끝났고, 영화도 끝났다. 마치 지금 하늘나라, 곧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은 웨슬리의 완전 성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의 완전 성화는 영과 육을 다 포함하여 말한다. 그러나 육은 절대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없다. 육은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웨슬리의 완전 성화가 아니다. 웨슬리의 완전 성화는 비성경적이다.
성도의 영의 구원은 끝났다. 예수님을 믿는 즉시 끝났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즉시 죄를 사 씻었다. 그래서 성도의 영은 죄가 없다. 성도의 영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5:18). 여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거듭난 자다. 예수님의 피로 죄를 다 씻어 구원받은 자다. 그리고 '범죄하지 아니한다'(3756, 264, 우크 하마르타네이)는 현재시상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해석하는데, 그럴지라도 지금 현재 계속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영에 대한 얘기다. 왜냐하면 거듭난 것은 영에 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회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도의 영은 더 이상 죄가 없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이 땅에 살지만, 벌써 천국에 입성했다. 그래서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고 박탈되지 아니한다. 성도의 구원은 영원하다. 그 성도는 마귀가 절대로 건들지 못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여기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마귀가 만지지도 못하고 성도의 구원을 빼앗아가지도 못한다. 구원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키면 작심삼일이 되고 만다. 예수님이 지켜주신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영원하다.
5. 육에게는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나님은 육에게 2가지 내용으로 구원을 적용하신다. 하나는 성도가 언젠가 재림 후에 신령한 몸(육)을 입게 될 것인데, 그때를 소망하며 예약하게 하신다. 재림 후에 모든 성도는 신령한 몸을 입는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3). 여기 ‘썩을 것’과 ‘죽을 것’은 지금 성도가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썩지 아니할 것’과 ‘죽지 아니할 것’은 재림 후에 입을 신령한 몸을 말한다. 지금 육의 몸을 입은 것처럼 그때에는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지금 이 땅에서 육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은 재림 후에 입게 될 영의 몸, 곧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을 소망하게 하신 것이다. 비록 육이 영처럼 죄 없는 상태의 구원은 아니지만, 그래서 지금 육신으로 죄를 짓는 삶을 살지만, 언젠가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을 소망하고 예약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성도의 육의 구원을 그렇게 적용하신다.
어떤 사람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다 변화되리니'(51절), '우리도 변화되리라'(52절)를 예수님 재림 때, 이미 있는 성도의 육신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 '변화된다'(236, 알라소)는 말은 이미 있는 것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미 있는 육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흙의 몸인 육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땅에 흙의 몸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도 신령한 몸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변화'라는 단어는 새로 창조되고 새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 땅의 흙의 몸과 하늘의 신령한 몸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흙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로 창조한 신령한 몸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흙은 신령한 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은 언제까지나 육이며 영은 언제까지나 영이라고 원칙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만약 흙의 몸이 변화되어 신령한 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화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육만 있는 동물 원숭이가 변화되어 영과 육을 함께 가진 영적인 존재인 사람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화론적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비성경적인 것은 세상적이다.
지금 입고 있는 몸(육)이 변화되어 신령한 몸으로 되는 것인가? 아니다. 지금 입은 몸은 흙의 몸이다. 흙의 몸은 흙 속으로 사라진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흙의 몸이 변화된다고 신령한 몸이 되지 않는다. 흙의 몸은 흙의 몸이다. 흙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법칙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육이 아무리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신령한 몸, 곧 영의 몸으로 되지 않는다. 육으로 난 몸은 끝까지 육의 몸이다. 신령한 몸은 하나님이 신령한 영에 합당하게 다시 창조하신다. 육의 몸이 있는 것처럼 영의 몸도 창조하신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이 말씀은 지금 육의 몸이 있는 것처럼 그때에도 영의 몸이 있다는 것이다. 영의 신령한 몸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육신이 영처럼 구원받아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흙의 몸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하나님은 육에게 영처럼 완전한 구원을 적용하시지 않으신다. 지금 성도가 흙의 몸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죄를 완전히 벗은 신령한 몸, 곧 영의 몸을 입히실 것을 기대하며 소망하며 살도록 구원을 적용하신다.
그리고 또 육에게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시는가? 그것은 육이 영의 촉구를 받도록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육이 영의 촉구를 받는다’는 말은 육이 영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뜻이다. 항상 영이 기준이다. 그래서 육이 영의 촉구를 따르도록 구원을 적용하신다. 성도의 육은 불신자의 육과는 다르다. 불신자의 육은 영의 촉구를 따를 수도 없고, 영을 따라 살 수도 없다. 영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도의 몸은 영의 촉구를 받아 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구원을 적용하신다. 영의 촉구가 어떤 것인지도 안다. 영의 촉구를 따르지 않고 죄를 지으면 어떤 징계가 온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성도는 계속적으로 자기의 몸을 영을 따라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 여기 ‘연단하라’는 말은 거룩한 영을 따라 살기 위해 육의 생각이나 육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창조부터 성도의 몸을 영을 따라 사는 도구, 또는 영을 위한 훈련 도구로 세웠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줄도 알았고, 범죄 할 줄도 알았고, 에덴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갈 것도 다 아셨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다. 성도의 관절과 골수를 다 들여다보고 계신다. 그래서 아담 때부터 성도를 훈련 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진리에 대해서 더 깊이 아는 자가 되도록 훈련 시킬 작정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도 알고, 선도 알고, 죽음도 알고, 부활도 아신다. 다 아신다.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려면 다 아는 훈련을 시켜야 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서 저주의 세상에서 다 경험하게 하시고, 훈련받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죽음도 알고, 죄도 알고, 죄 씻음도 알고, 부활도 알고, 천국도 알도록 훈련 시키신 것이다. 그 훈련장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 훈련장이 바로 이 땅이다. 그 훈련의 도구가 바로 성도의 육신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도구로 삼아 훈련하게 하신다. 그 육신을 마귀를 섬기는 도구가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게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지금도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에게 드리는 불의의 무기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의의 무기로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바로 훈련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그 훈련을 통해서 육신이 영을 따라 살게 만들고, 그렇게 살게 하심으로 상급을 쌓게 하고, 영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영으로 훈련하시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 영과 육이 다 구원받았다. 그러나 영은 완전한 구원을 받았지만, 육은 영을 위한 훈련 도구로 사용되도록 하셨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육신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영이 죄를 씻음 받아 구원받았으므로 천국 입성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육은 처음부터 천국에 입성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영을 위한 훈련 도구나 재림 후에 신령한 몸을 입을 것을 소망하는 예약의 도구로 세웠다. 지금 성도의 육신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구원이 박탈되거나 천국에 입성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신이 계속 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을 따라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 그래서 육이 부지런히 죄를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육신이 짓는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않고, 징계가 오기 때문이다. 육신이 죄를 짓는다고 지옥 간다는 뜻은 아니다. 성도는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지옥을 벗어났다. 그러나 성도가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짓는 삶이 계속된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따른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징계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지옥 간다는 뜻이 아니다.
성도의 구원은 영의 구원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여기 '영혼'(5590, 프쉬케)은 사람의 고기덩어리인 육신이 아니라 마음, 생명, 영혼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성도의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데, 육신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이다. 만약 육신이 죄를 지어 더 이상 영의 촉구를 따라 살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육신은 멸하고 영을 구원하신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여기 ‘사탄에게 내어주어 멸한다’는 말은 육을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영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결국은 육신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구원이다. 육신도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불신자처럼 죄를 짓는 그런 육이 아니다. 성도의 육은 죄를 짓기는 하지만 영의 촉구를 들을 줄 아는 육이다. 그래서 영의 촉구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육이다.
만약 성도의 육신이 죄를 짓는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천국 입성을 하지 못한다면 모든 성도는 다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죽을 때까지 죄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회개하면 반드시 죄를 용서받는데, 죽을 때까지 자기가 지은 죄를 몇 퍼센트까지 회개할 수 있는가? 절대로 다 회개하지 못한다. 만약 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회개하지 않는 죄 때문에 다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성도의 구원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아직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다. 지금 성도가 죄를 지으며 죄 속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아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무던히 믿음으로 거룩하게 산다. 구원으로 천국 입성은 하나님이 안전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부지런히 영의 촉구를 따라 의의 무기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죄짓는 우리는 일찍 천국으로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이 땅에서 훈련받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더 많은 상급을 쌓을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감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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